언론과 애널리스트의 축제라고도 불리는 EMC 월드(EMC World)가 올해도 성대하게 치러졌다. 올해 행사에서 특히 필자의 흥미를 끈 세션은 EMC 벤처스(EMC Ventures)의 벤처 투자 활동을 주제로 스콧 달링이 진행한 세션이었다.
최근 인텔(Intel)의 투자 그룹 리더로부터 비슷한 주제의 이야기를 들었던 바 있다. 인텔과 EMC 두 그룹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비슷하면서도 꽤 상반됐고,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다.
인텔의 투자 초점은 ‘인텔 제품을 이용하는 젊은 기업들’에 맞춰져 있다. 반면 EMC는 향후 성장을 통해 자본을 확충하고, 결국 새로운 솔루션을 구매할 가능성이 있는 젊은 기업들에 투자한다. 전략의 출발점부터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EMC의 달링은 자신들이 가장 흔히 목격하는 ‘5 단계의 벤처 캐피털 거절’ 과정에 관해 소개했다.
왜 대기업에서 혁신이 멈추는가
왜일까? 지금껏 시도되지 않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혁신의 출발점이 안정적인 기반의 거대 기업들이 아닌, 작은 업체들일까? 또 이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누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그저 ‘대기업에선 창의력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조금 더 고민해본다면, 그런 상황의 이면에 보다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규정된 사항을 준수하는 문제가 더욱 강조된다. 또한 그러한 기업들은 대부분 이미 자신만의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과정을 ‘바꿔버릴’ 무언가를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혁신의 시작은 변화다. 그러나 안정적인 프로세스가 갖춰진 기업들에선 엄격한 명령 및 통제 체계를 뚫고 무언가 의미 있는 변혁이 이뤄질 여지가 훨씬 적다.
록히드 마틴의 극비 프로젝트 그룹 스컹크 웍스(Skunk Works)는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모델이다. 모기업과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보다 적은 관리 감독 하에서, 기업의 미해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이들 그룹의 역할이었다.
기업의 정책이 혁신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또 때로 자신의 기반이 침해 받는다는 생각을 가진 임원이 혁신의 노력을 중단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스컹크 웍스의 기본 의도다.
이미 성공을 입증한 모델이기에 스컹크 웍스 모델이 시장 전반에 확산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와 다르다. 이후 많은 유사 모델들은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대개 그러한 그룹을 구성한 일원들이 기업의 정책을 완전히 체화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움을 추구하려 조직된 팀이 어느 곳에서나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만을 가져온다면, 누가 거기에 투자하겠는가?
EMC와 같은 기업들이 진행하는 펀딩 프로그램 역시 그와 유사한 목적을 가진다. EMC의 벤처 그룹은 현존하는, 혹은 향후의 문제 해결에 있어 EMC 자신들보다 뛰어난 역량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중소기업들을 발굴해 자금을 지원한다.
시장을 잠식하는 대기업이 아닌, 파트너로서 혁신적 기업들과 호혜적 관계를 구축하는 게 EMC 벤처 그룹의 주요한 목표다. 비유하자면 20세기의 소니가 애플에 투자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구글에 투자하는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를 듣고 누군가는 구글에 투자를 진행했던 야후의 사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는 파트너십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새로운 경쟁의 형태였다. 야후는 투자를 통해 구글의 프로세스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했다)
여기 참신한 기술이 벤처 자본(자원) 유치 과정에서 발생하는 5단계 거부 반응을 살펴보자. EMC의 투자 그룹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단계: 거절
어떤 투자 요청이 보고됐을 때, 임원들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이 현명한 투자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실용성 있었다면, 해당 기업에서 진작 채택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테크놀로지가 어디에도 쓸모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게 그들의 논리다. (외부의 노력을 부정하기 위해 기업의 자체 규정을 내세우는 그들의 논리가 특히 흥미롭다.)
2단계: 분노
어찌어찌 투자를 승인 받고 해당 기업의 기술이 성공으로 이어진다면, 다음 난관이 기다린다. 자신들의 자금으로 경쟁사를 키운 상황에 현업 임원들이 분노를 표시하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또한 결국 외부의 시도를 죽이기 위해 기존 권력을 활용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 단계와 앞 단계는 결국 ‘왜 그런 기술이 이 기업에서는 싹트지 못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3단계: 호기심
테크놀로지의 성장이 계속되고, 시장의 누구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이 확인되면, 이제 임원들은 벤처 업체에 연락해 만남을 가지려 한다. 그들의 기술과, 거기에 고객들이 반응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는 목적이다. (스컹크 웍스 프로젝트의 경우 임원들의 적의를 어느 정도 이겨내고 이 단계까지 도달했기에 지금처럼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4단계: 협업
상대 기업과의 만남 이후 임원은 왜 그들의 접근법이 더 나은 것인지를 이해하고, 그들과의 더 깊은 교류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게 된다. 이제는 ‘현실적이고 매력적인’ 것임을 인정한 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재판매 하는 게 그들의 새로운 목표로 자리잡는다. (스컹크 웍스의 경우에는 이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 시작부터 기업의 내부 그룹으로 출발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5단계로 넘어간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5단계: 인수
파트너링과 공동 판매의 다음 단계는 그 성공적인 벤처를 인수하는 것이다. 4단계를 영리하게 닦아놓은 기업이라면 인수 과정 역시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다. 엔지니어링, 세일즈, 재무 등 이미 많은 영역에서 만들어진 연결 고리가 인수 과정에서의 혼란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기업은 정책으로 존속한다
IBM에 몸을 담은 시절 필자는 기업의 정책에 수시로 놀라곤 했다. 정책은 기업에 영원의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목표로 하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EMC와 인텔의 벤처 캐피털 프로그램 역시 궁극적인 목표는 여기에 있다.
인텔의 목표는 떠오르는 기업들을 지원해 그들이 인텔의 솔루션을 구매하도록,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 새로운 방법론들을 창출하도록 하는데 있으며, EMC 그룹은 지원 기업들이 EMC에 혁신의 자극제가 되어주길, 그리고 그를 통해 EMC라는 이름이 언제까지 낡아 버리지 않길 원하고 있다.
EMC가 쉽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인수한 일련의 기업 목록이, 그리고 그들과 긴밀하게 엮여있는 또 한 목록이 EMC 벤처스의 성공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두 기업의 접근법 모두 각자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에 따른 팀 구조 역시 꽤 차이가 있을 것이다. 두 전략의 우위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두 기업을 제외하면 설립 20년 만에 이처럼 독창적인 방식을 고안한,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기에 성공적으로 발을 내디딘 기업은 얼마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Rob Enderle은 엔덜 그룹(Enderle Group)의 대표이자 수석 애널리스트다. 그는 포레스터리서치와 기가인포메이션그룹(Giga Information Group)의 선임 연구원이었으며 그전에는 IBM에서 내부 감사, 경쟁력 분석, 마케팅, 재무, 보안 등의 업무를 맡았다. 현재는 신기술, 보안, 리눅스 등에 대해 전문 기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dl-ciokorea@foundryco.com